전두환은 1955년 10월 육사를 졸업한 전두환은 소위로 임관하여 21사단 소대장이 됐습니다.1957년 중위 시절엔 보병학교의 교육장교, 중대장 등으로 근무했습니다.
1959년 6월부터 미국으로 유학하여 미국 육군 특수전학교에서 5개월 간 심리전·특수전 과정을 수료하고, 그 다음해에도 6개월 간 미국 조지아주 포트베닝의 레인저스쿨 과정을 밟는 등 직업 군인으로서 일종의 경력 관리를 했습니다.
1960년 12월 귀국해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장 직무대리로 일하고, 1961년 4월 서울대 문리대 ROTC 교관을 지냈습니다.
같은 해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당시 박정희는 육사를 장악하기 위해 오치성, 박창암, 차지철 등 3명의 장교와 무장병력을 육사로 보냈습니다.
이들은 육사 생도들에게 혁명 지지 시가 행진을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생도들은 당시 육사 교장 강영훈의 지시로 시가 행진을 거부했고, 전두환은 이 사실을 박정희 일당에게 보고해 강영훈은 구금됐습니다.
1961년 5월 18일 오전 전두환은 육사 생도 800여 명을 이끌고 동대문에서 광화문, 시청, 남대문을 거쳐 다시 시청에 집결하는 쿠데타 지지 데모를 벌였습니다.
이 일로 박정희 눈에 들어 같은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담당비서관으로 임명됐습니다. 이를 계기로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군에서 승승장구했습니다.
특히, 전두환은 1962년 육사 11기인 노태우,손영길, 김복동, 최성택 등과 함께 군부 내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이끌었습니다.
1963년 중령으로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을 지냈고, 1965년 육군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을 거쳐 1969년에는 동기들 중 최초로 대령으로 진급했고 12월 육군참모총장실 수석부관이 됐습니다.
1970년에는 11월 22일 백마부대 29연대 연대장이 되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1971년 11월 귀국한 이후 장군 보직인 1공수특전여단 여단장에 파격적으로 임명됐고 1973년 1월 1일 임기제 준장이 됐습니다.
'하나회'의 우두머리였던 그는 1973년 '윤필용 사건'에서 위기를 맞는 듯했습니다.
당시 보안사령관 강창성은 박정희의 지시로 군의 실세였던 장군 윤필용을 조사하면서 그가 후원하던 군 내 사조직 하나회를 적발했습니다.
하나회는 박정희의 지원을 받는 친위 조직이었습니다. 당시 하나회 회원은 220여 명에 달했고 비밀 점 조직 방식으로 운영했습니다.
기수로는 육사 11기에서 20기에 이르며 장성에서 중위까지 걸쳐 있었습니다.
정규 육사 출신 중 기수별로 5% 수준은 10명 내외로 뽑고, 회원 다수를 영남 출신으로 하되 다른 지역 출신을 상징으로 끼워넣는 식으로 구성됐습니다. 이들은 진급 1순위와 주요 보직을 독차지 했습니다.
윤필용 사건으로 손영길 준장 등 하나회 소속 장성 3명을 포함한 장교 13명이 징역형을 받았고, '윤필용파'로 분류된 장교 31명이 강제 예편됐으며 160여 명이 감시대상으로 분류됐습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 하나회의 수장인 전두환은 건재했습니다. 오히러 이 사건으로 하나회 내 경쟁자를 제거하고 1인자로 자리잡을 수 있었습니다.
전두환은 1974년 11기 최초로 정식 준장이 되었습니다. 1976년 대통령 경호실의 작전 및 보안 차장보가 됐다가 1978년 1월 육군 제 1사단장으로 부임했습니다.
12.12 사태
전두환은 1979년 3월 군 내부의 정보를 장악할 수 있는 국군보안사령관이 됐습니다.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하나회도 다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같은해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피살됐습니다. 전두환은 박정희 피살 사건 조사를 맡은 합동수사본부의 책임자였고, 막강한 정보력과 권력을 쥔 보안사의 사령관이었습니다.
게다가 하나회를 이용해 군 내부 동향도 세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전두환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와 군 인사권 등을 둔 권력 갈등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전두환은 1979년 12월 12일 밤 7시 보안사 수사관 8명과 합동수사본부 헌병 1개 중대 60여 명을 동원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해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데려갔습니다.
혐의는 '박정희 암살 공모'로 박정희 피살 당시 정승화가 피살장소인 궁정동 안가의 본관 식당에 있었다는 이유를 댔습니다. 12.12 사태입니다.
전두환은 대통령 최규하로부터 정승화 체포에 사후 재가를 받아냈습니다. 이후 전두환은 대대적인 군 인사를 단행해 군을 장악했습니다.
전두환은 1980년 4월 중앙정보부 서리에 임명되어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를 모두 거머쥐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시절부터 정치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정치, 외교, 경제, 언론 등 모든 분야에 관여하는 등 권력의 핵심 기구였습니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은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를 열고 계엄을 확대했습니다.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 정계를 대표하는 3김을 체포하거나 가택 연금하고 그외 정치세력을 모두 체포했습니다.
광주 5.18 민주항쟁
계엄이 확대되고 김대중 등의 정치인이 체포되자 광주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며 저항했습니다.
광주 시민봉기는 5월 18일에 시작되어 27일까지 지속됐고, 전두환 세력은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시민들을 학살했습니다.
신군부는 5월 22일 김대중이 폭동을 조종하고 있다며 그에게 내란 혐의를 씌웠습니다. 계엄사 측은 철저한 보도 통제 속에 배후에 북괴 간첩과 불순분자들이 있다고 주장하고,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내몰았습니다.
5월 21일 국무총리 신현확을 비롯한 국무위원 전원이 광주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로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전두환은 이 상황을 이용해 최규하에게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을 재가할 것을 요구했고, 본인이 상임위원장에 올랐습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대통령 자문기구 형식으로 설치됐지만 신군부가 내각을 장악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행정기구이자, 실질적으로 사법·입법·행정을 모두 장악한 초헌법적 기구였습니다.
국보위는 부패 · 비리 척결을 명분으로 공직자. 국영기업, 공기업, 금융기관, 교육계 등에서 1만 명을 넘는 사람들을 해직했습니다.
대통령 취임
전두환은 1980년 8월 6일 스스로 준장에서 대장으로 진급했습니다. 8월 16일 최규하가 하야선언을 하자 다음날 전역(예편)을 하고 자신의 후임으로 중장 노태우를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에 임명했습니다.
5일 뒤인 8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간접 선거에 무소속으로 단독 출마해 99.9퍼센트(2524표) 지지율로 제 11대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이어 9월 1일에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은 헌법 개정 작업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당시 대통령의 임기를 7년 단임제로 수정하는 개헌 작업은 1980년 6월부터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980년 9월 9일에 정부개헌심의위원회에서 제5공화국 헌법 개정안이 의결됐고, 9월 29일에 공고됐다. 10월 22일에 국민투표를 실시해 확정되자 27일에 공포됐습니다.
전두환은 1981년 1월 15일 민주정의당(민정당)을 창당하고 본인이 총재가 됐습니다.
또, 정치 규제 대상자로 발표한 정치인 가운데 정권에 협조하는 인사를 뽑아 민주한국당(민한당)과 한국국민당(국민당)이라는 2개의 야당을 창당했습니다.
이를 두고 '1대대, 2중대, 3소대'라는 비아냥이 나왔습니다. 전두환도 민한당과 국민당을 야당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각 당의 총재인 유치송과 김종철도 야당 총재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전두환은 이른바 '김대중 일당 내란 음모 사건'을 시급히 종결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당시 계엄사는 1980년 7월 31일에 김대중을 비롯한 24명을 군법회의에 내란음모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한 상태였습니다.
김대중은 1981년 1월 23일에 대법원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고, 그날 무기로 감형되어 청주교도소에 수감됐습니다. 김영삼은 가택 연금하고 정계에서 물러나도록 조치했습니다.
전두환은 미국으로 가 1월 28일부터 2월 7일까지 로널드 레이건을 만났습니다. 이어 2월 25일 대통령 선거에 유치송, 김종철, 김의택 등과 함께 대통령에 출마했습니다.
5271명의 대통령 선거인단이 전국 77곳의 투표장에서 선거를 마친 결과 전두환은 90.2퍼센트인 4755표를 획득해 12대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이른바 '체육관 선거'입니다.
말년에 이르러 회고록 내용에 대한 광주민주화운동 관계자의 고소에 따라 재판정에 오가는 가운데 전두환은 급격히 노쇠해진 모습을 보였으며, 곧 다발성 골수종이라는 악성 혈액암을 앓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12·12 군사 쿠데타의 동지였으며 전두환에 이어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가 2021년 10월 26일 타계한 후, 한달도 되기 전인 2021년 11월 23일 전두환은 지병으로 자택에서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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