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리지 않는 의문의 죽음
조선왕조에서 비운의 왕세자로 회자되는 인물인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 사도세자와 함께 왕세자였음에도 왕이 되지 못하고 요절한 비극의 주인공이다. 소현세자와 관련한 가장 큰 의혹은 바로 그의 죽음에 있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1612년(광해군 4) 1월 4일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친이 왕위에 오르자 14세의 나이로 세자로 책봉되었고, 1627년 강석기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병자호란 후 정축 맹약에 따라 1637년(인조 15) 2월 8일 아우인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8년 만에 귀국하였지만,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사망하였다. 오한이 나 병을 치료받은 지 불과 4일 만이었고, 34세의 젊은 나이였다.
공식적인 병명은 학질, 즉 말라리아였다. 학질은 대개 모기에 의해 발병이 되는 것으로 오한과 발열이 반복되고 땀과 갈증이 심해지며 주기적인 발작 증세와 함께 심하면 사망에 이르기도 하는 병이다. 온대지역에도 말라리아가 유행하였기에 오래전부터 한방에서도 학질에 대한 치료로 침구와 약 처방이 있어왔다. 그런데 온대지역의 말라리아는 열대형과 달리 어린이나 노약자가 아니면 급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소현세자의 병명이 학질로 진단을 받은 이후 의원들은 그에 적절한 처방을 진행하고 있었다. 침과 함께 소시호탕과 같은 탕약이 처방되었다. 그러나 세자의 증상은 급격히 나빠져 갔다.
소현세자가 사망할 즈음, [조선왕조실록]에는 심상치 않은 기록이 있다. 소현세자가 학질로 진단받던 4월 23일 다음날에 화성이 적시성(積屍星)을 범하였다는 기록과 경상도 칠곡현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실록에 지진에 대한 내용은 수천 건에 이르고 있으므로 특별히 이상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시성과 관련한 기록은 흔한 것이 아니다. 적시성은 죽음을 상징하는 재난의 별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면, 조선왕조 전 시기 동안 적시성과 관련한 기록은 24회 정도에 불과하다. 그만큼 드문 천문현상이며, 불길한 징조로 해석되었다. 인조 대에 적시성과 관련한 기록은 총 4회이다. 적지 않은 기록이다. 총 4회 중에 주목되는 것은 병자호란 발발 2년 전인 1634년과 소현세자가 사망한 1645년이다.
4월 24일 세자가 침을 맞았다
4월 24일 화성이 적시성을 범하였다.
적시성을 범하는 오성(五星)은 목성과 화성이다. 이 가운데서도 화성은 목성보다 더 불길한 것으로 해석된 듯하다. 적시성 관측 기사는 마치 조만간 있을 세자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튿날인 4월 25일 세자는 다시 침을 맞았으나, 병세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그 다음날 26일 오시(午時)에 창경궁 환경당(歡慶堂)에서 사망했다. 급작스런 죽음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종실이었던 진원 군 이세완(李世完)은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시신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발견했다. 이세완이 본 세자의 모습은 학질이 아닌 약물 중독으로 죽은 모습이었다. 세자의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피가 흘러나와 얼굴 반을 덮어 놓은 상태였다. 이세완은 얼굴이 온통 피로 물들어 얼굴빛이 검어도 주위 사람들이 이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고 증언했다.
소현세자가 병에 걸렸을 때 담당 의원은 이형익이라는 자였다. 이형익은 3개월 전에 의관으로 특별 채용된 자로 소현세자 내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인조의 애첩 조소용의 친정에 출입하던 자였다. 인조실록의 편찬자가 소현세자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면서 조소용이 세자 내외를 평소 인조에게 무함했던 일을 함께 거론한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돌연사에 가까운 소현세자의 죽음은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자식의 죽음을 대하는 인조의 태도는 더 의아했다. 대신들이 의원 이형익을 국문하여 처벌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간청했으나, 인조는 그런 일은 다반사므로 굳이 처벌할 필요 없다고 했다. 게다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례마저 거의 박대에 가까운 수준으로 간소하게 했으며, 그 예법마저도 세자의 지위에 걸맞지 않은 것이었다.
부친인 인조의 미움을 받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도착한 것은 1637년 4월이었다. 선양에는 소현세자를 비롯한 왕실 가족,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의 관리, 사역원 역관, 선전관, 의관 등이 있었는데, 이들을 합하면 총 200명에 가까웠다. 선양에서 이들은 새로 건축한 심양관소, 즉 심관(審館)에서 생활했다. 심관은 양국 간의 각종 연락사무나 세폐와 공물의 조정, 포로를 중심으로 한 민간인 문제 등을 처리하는 일종의 대사관 같은 기능을 했다. 선양 생활은 단조로운 고국에서의 생활과 달리 무척 다양하고 바빴다. 소현세자는 조선과 청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그 나라 고관들과 친분을 맺었다. 또 뇌물 외교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청과의 무역이나 둔전(屯田) 경영에 참여하여 재력을 비축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선인 포로를 구출해 냈다. 부인인 세자빈 강 씨는 영리하고 사업 수완이 좋아 외교적인 문제는 소현세자가, 경제적인 문제는 세자빈 강 씨가 주도하였다.
청은 중국 통일의 야망이 있었으므로 조선의 도움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세자를 적극적으로 포섭하고자 했다. 조선을 담당하고 있던 용골대는 세자와 마음을 터 놓는 사이처럼 지냈다. 처음 심관 생활은 엄중한 감시와 제한 속에 보내야 했지만, 점차 청은 세자에게 각별하게 대했다. 몽고 각지의 행사에도 초대했고 정기적인 연회에도 세자 부부를 참석시켰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조선지원병과 물자 요구가 있었고 이를 조선에 보고해야 하는 세자의 입장은 항상 바늘방석이었다. 1644년 마침내 청은 북경을 차지했고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자살했다. 더 이상 청은 조선의 왕세자를 인질로 묶어둘 이유가 없어졌고,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중원을 차지한 청의 힘을 지켜본 소현세자는 삼전도의 굴욕만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는 인조와 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반대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와 서인세력은 소현세자의 태도에 대해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오랜 인질 생활을 마치고 조선에 귀국했지만, 인조는 소현세자를 반기지 않았다.
어느덧 인조에게 소현세자 내외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비치고 있었다. 귀국 전부터 소현세자가 왕이 되고자 청나라를 부추겨 부친인 인조를 선양에 오게 만드는 공작을 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인조는 청이 왕위를 세자에게 양위하라고 할까 봐 불안해했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냉담한 환대 속에 귀국했고, 그가 가져온 청나라 물건은 인조의 불쾌감을 가중시켰다. 인조에게 비친 소현세자 내외는 청에서 고초를 겪다 온 것이 아닌 호강을 하다 온 것처럼 보였다. 결국 소현세자는 가져온 채단(彩段) 4백 필과 황금(黃金) 19냥을 호조로 돌려보냈다.
선교사 아담 샬과의 만남
소현세자는 귀국하기 직전 70일 정도를 북경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독일 출신의 신부인 아담 샬을 만났다. 소현세자는 아담 샬과 친교를 맺으며 그로부터 학술과 종교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근 8년이나 외롭게 외국 생활을 했던 소현세자로서는 벽안의 외국인이 흥미롭기도 하고 그가 가진 식견이 놀랍기도 했다.
아담 샬은 역대 중국에서 외국인으로는 가장 고위직까지 올라간 인물이었다. 중국 포교 1세대인 마테오 리치의 뒤를 이어 1622년 중국으로 건너가 가톨릭 포교활동에 힘쓰며 천문·역법에도 밝아 월식(月蝕)을 예측하여 황제의 환심을 얻었다. 명나라 말에 북방의 청에 대항하기 위해 대포를 주조하기도 하였으나, 명이 망하고 청이 집권한 이후에는 다시 청 세조의 신임을 받아 천문 관측을 담당하는 흠천감의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아담 샬의 지위로 인해 소현세자는 천주당과 문연각에서 그를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다.
아담 샬도 소현세자와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겼다. 세자가 희망하는 대로 서양의 천문학을 알려주고 각종 천주교 서적과 관측기구를 선물로 주었다. 이때 소현세자가 아담 샬로 받은 선물은 천주상·지구의·천문서 등이었다. 소현세자는 천주상을 벽에 걸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고백했다. 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만나면서 조선에 천주교를 선교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소현세자는 자신이 귀국하면 조선에서 서양과학 서적을 간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또한 세자는 북경의 천주당 주교인 아담 샬에게 자신과 함께 조선으로 갈 서양인 신부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양인 신부는 청에서도 부족한 상황이었고, 소현세자는 부득이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강빈과 원손의 죽음
왕세자로서 국가 경영을 고민하고 탁월한 외교 감각을 지녔던 소현세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면, 조선 역사는 달라졌을까. 소현세자의 죽음은 여러 가지로 안타까운 점이 많다. 소현세자의 불행은 그가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조는 세자가 죽으면 세손에게 왕위를 전해야 하는 법을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는 것은 세손인 소현세자의 아들과 강빈에게는 불행을 의미했다. 왕위 계승자가 제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면 그 끝은 죽음이었다. 인조 입장에서 강빈과 원손의 존재는 골칫거리였다. 반정을 주도하여 왕위에 오른 인조는 정통성 확보에 예민했고, 왕좌에 대한 집념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는 화근을 미리 자르고자 했다. 그 첫 번째 칼끝은 강빈의 형제들에게 향했다. 인조는 봉림대군이 세자가 된 것에 강 씨들이 불만을 품고 있을 것이라 하며, 이들을 귀양 보내려 했다. 드러난 죄가 없으므로 귀양 보낼 수는 없다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강빈의 형제 4명을 귀양 보냈다.
결국 죽음의 그림자는 강빈에게도 닥쳤다. 1646년 1월 3일 인조에게 올린 전복구이 안에 독약이 들어 있었다. 인조는 강빈을 주모자로 지목했다. 인조는 강빈의 나인 5명과 음식을 만든 나인 3명을 잡아다가 국문했다. 전복구이 사건은 강빈을 죽이려는 모함에 불과했다. 이 사건의 진상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는 계속해서 강빈이 독을 넣었다고 고집을 피웠다. 한 달 뒤, 인조는 김류·이경석·최명길·김육·김자점 등을 불러 “강빈이 평소 무례한 여자인데 무슨 짓인들 못하겠냐”며 처벌할 것이라 했다. 대신들은 지나친 처사라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인조는 폐출되어 사사된 연산군의 생모 윤 씨를 떠올렸다.
김자점은 인조의 독단적인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그는 일찍이 후계자 논의에서 원손 대신 봉림대군을 내세우려는 인조의 주장에 편을 든 전력이 있었다. 최명길과 이경석 등 대부분의 신료들은 강빈의 죄가 비록 크다 하더라도 용서해 주는 것이 옳다고 했다. 대신들의 의견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인조는 마음먹은 것을 실천에 옮겼다. 강빈의 형제 들 중 강문성과 강문명이 누이가 한 일을 모를 리가 없다는 죄목으로 국문을 받다 곤장에 맞아 죽었다. 강 씨 형제가 죽자 그다음 차례가 강빈 임을 세상이 다 짐작했다. 3월 15일, 강빈은 왕을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았다. 이어서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두 아들 또한 제주도 유배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었고, 강빈의 친정어머니도 처형되었다.
일찍이 인조는 소현세자를 위하여 신붓감을 고르는데 한 처녀가 부덕을 갖춘 것 같아 내심 마음으로 점지해 두었다. 그러나 그녀는 보기와 달리 앉고 서는 것이 예의가 없고 마음대로 크게 웃었으며 음식을 손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인조는 결국 다른 여성을 며느리 감으로 선택했다. 이후 인조는 부덕 높은 부인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그녀는 세자빈 간택 시에 며느리감으로 점지해 둔 바로 그 처자였다. 이때 인조는 “내가 그녀의 꾀에 넘어갔도다”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화려한 세자빈의 자리가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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